“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로 네 눈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
(잠언 3장 21, 24절)
다른 분들처럼 청와대를 떠나 서울주변에 머물지 않고, 시골에 내려가 사신다기에 어쩐 일이신가 했다. 그런데 시골 구석에 어울리지 않는 대저택을 짓길래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원체 평범한 분은 아니시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그는 농촌과 외지사람들에게는 크게 성공한 분으로 부러움 사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모습을 보이시는 듯 보이기도 했다. 진정 그 자신이 원치는 않으셨겠지만, 시골생활을 참 독특하게 보내시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러한 분께서 요즈음은 마음이 두렵고 불편하고 정말 얼굴이 쪽 팔려서 밤잠을 설치는 듯도 싶다. 세상 사람들에게 잠가 놓고 있던 비밀스런 문이 본의 아니게 열리었고, 그 열린 문으로 돌연 악취가 풍겨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잠이 잘 올 리가 있겠는가! 어쩌면 그는 열린 문 그 사이로 바깥으로부터 기분 나뿐 냄새가 스며 들어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정치적 보복 말이다. 그래서 밤새워 막걸리를 그렇게 마시는가 보다. 제 코를 막아도 냄새가 이미 몸에 배어 있으니 말이다. 어째거나 빈 막걸리 통이 쓰레기 백에 가득 채워져서 집 문밖으로 버려진다니 안쓰러운 생각마저 든다. 더구나 술기운에 쓰러져 자다가도 가위에 눌리는 통에 매일 밤 잠을 설치실 은퇴 부부와 저들의 친지들과 그리고 측근 식솔들이겠기에 말이다.
요즘 그에게 있어‘600만 불의 사나이’, ‘완쇼남(완전 쇼 하는 남자), ‘평소 도덕적 청렴성을 강조하다 뒤늦게 본색이 드러남’ 등 별 말들이 다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김동길 명예교수는 “링컨을 존경한다더니, 이게 뭡니까?” 라고 특유의 한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정말 그에게 있어서나 나라에 있어서나 이게 뭡니까? 부끄럽고 망신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슨 이유에선지 시골까지 내려 갔다면, 정말 농사나 지으며 조용히 사셨으면 했다. 그런데 관광지 아닌 관광지를 조성하여 놓고, 공연히 일손 바쁜 사람들을 집 주변에 들끓게 만들더니, 이제는 그야말로 전국적으로 그답지 않은 이상스러운 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큰 저택에 고급 침대에 눕는 다하여 마음이 편하고 잠이 잘 오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나도 요즈음은 왠지 잠자리를 한번 바꾸어야만 잠을 푹 잘 수가 있다. 처음엔 침대에 누워 잔다. 그리고 새벽예배에 다녀와서는 부족한 잠을 채우기 위해서 아래 층에 있는 긴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 곳이 왠지 잠자리로서 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TV로 아침 한국뉴스를 누워 보다가 깜빡 잠들곤 하던 것이 이제 습관이 된 것 같다.
경제가 가 어렵다. 나라 경제가 어렵고, 기업의 경제가 어렵다. 그러니 가정과 교회의 경제도 어려워졌다. 나는 목사로서 새삼 무능함과 실망감을 가져본다. 교회 재정이 말이 아닌데도 헌금의 ‘헌’ 자도 말하지 못한다. 도리어 교인들에게 위로하고 격려하지만 나에게 임하는 무거운 책임감은 벗을 길이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은연중 있어 교회가 파산되지 않고 우리의 가정이 굶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에 있어서 감사하게 된다. 진정 일용할 양식이 끊기지 않도록 돌보시면서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뿐이다. 교인들도 아직은 직장을 잃지 않아 감사하고, 생활이 힘든 것 크게 내색하지 않고 그래도 주일을 성수하고 있으니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최근에 도둑을 맞은 성도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단 종교의 사람들이 접근 유혹한다는 말도 들었다. 참 어수선하고 위험스런 세상이 되었다. 진정 누울 때에 두려움이 오고 누운즉 평안치 못하여 잠을 설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마을에 불이 났다. 사람들은 불을 끄기 보다는 불구경 하느라고 발 끝을 세우고 있다. 이때 한 아버지가 아들을 목 등에 태워 구경시키면서 하는 말이 “아들아! 너는 아비 잘 만난 줄 알아라 그리고 엄마에게 감사 해야 한다. 우리는 집이 없으니 불이 저렇게 날 일이 없지 않니, 저기 연기 나는 창문에 매어 달린 아이 좀 봐라, 너에게는 저런 가슴 아픈 일이 절대 없을 거야!”
어느 스님은 무소유의 삶으로 행복을 찾게 되었다고 책도 내었다. 지인으로부터 비싼 ‘난’을 선물 받게 되었단다. 그런데 그 놈을 모시기에 원체 까다롭기도 하고 비싸신 몸이라 마음이 자꾸 가더란 다. 그래서 중으로서의 생활이 불편해 지셨다고 한다. 시간 맞추어 물주고, 아침 햇살에 밖에 내 놓고, 햇살이 뜨겁기 전에 다시 집안에 둘여 놔야 하고 말이다. 그리고 어느 날 중요한 만남이 있어 그 놈을 집에 놓고 가게 되었는데, 왠지 하루 종일 그 녀석에게 신경이 가 있어 안 되겠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지인에게 그 난을 선물하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해지고 평안하여지더란 다. 지당하신 말씀이겠다.
그러고 보면 나는 가진 것이 너무나 많다. 집이 있고 아내와 두 아들도 있다. 집안에는 책이 또 많은 편이다. 그리고 뒤뜰에는 3불에서 20불 미만으로 사서 심은 나무와 선인장과 화초가 자라며 해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또한 뒤뜰은 여기 저기서 주어 모은 예쁜 돌들로 꾸며져 있다. 돈을 최소한으로 들이려고 내 손으로 직접 뒤뜰의 정원을 조그마케 만들고 있는 중이다. 벌써 3년째 이 작업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미완성으로 진행되고 있다.
어쨌던 나는 소유한 것이 많다. 나는 스님과는 반대로 소유의 삶을 즐긴다. 돌멩이 하나하나 나무와 선인장과 화초 하나하나 내가 직접 주웠고, 심었고, 물을 주었기에 정말 나에게는 나의 가족과 함께 소중한 것들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해마다 조금씩 자라게 해주시고 꽃피우시고 열매도 맺게 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신기하면서도 그 모습들을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즐겁고 흐뭇해 진다. 그리고 해마다 애정도 더 하여 짐을 숨길 수 없다.
그러나 그 어느 날엔가는 나는 나의 소중한 이들의 곁을 떠나야 한다. 그래서 내 곁에 두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이들은 나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다. 사실 저들은 나의 소유가 된 적도 없다. 그저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하고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면서 말이다.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의 인류에 대한 사랑을 전하여 가르치고 나누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그리고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하시기 위해 또한 십자가를 지셨다. 소유란 없다. 서로 나누고 섬기며 사랑하기 위한 존재로서 우리는 함께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지혜요 생명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주안에서 참 평안을 찾고, 그 그늘아래에 앉아 쉬기도 하며, 누워 잠잘 수 있겠다.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한 일인가! 흉흉한 이 세상을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마음으로 평정하자.